▣ 언 제 : 2011. 5. 8 ~ 5. 9 (1박 2일)
▣ 어 디 를 : 지리산 덕두산, 바래봉, 세걸산, 큰고리봉
▣ 누 가 : 고집통 홀로
▣ 날 씨 : 1일차: 맑음, 2일차: 흐림
▣ 산행 시간 : 10 시간22 분
1일차 : 구인월마을(9:15)→덕두산(12:40)→바래봉(13:23)→세동치(16:43) 7시간 28분
2일차 : 세동치(7:56)→세걸산(8:30)→큰고리봉(10:30)→정령치(10:50) 2시간 54분
▣ 산행 거리 : 구인월마을→덕두산→바래봉→팔랑치→부운치→세동치→세걸산→큰고리봉→정령치(14.1Km)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회사에 상사가 있듯이 소주병, 양주병 이런 병들까지 상사가 있다는 얘기는 아니고 싸움에 이기고 지는 것은 상시로 있을 수 있기에 한번 실수는 용서해줄 수 있다는 이야기랍니다. 그렇다면 두 번 실수 그것도 병가지상사라서 용서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네 세상에는 삼세판이라는 좋은 제도가 있어 두 판 채까지는 나 자신과의 약속이니까 내가 너그러이 용서를 해주면 됩니다.
회사 근속휴가를 5월 퐁당퐁당 연휴를 곁들여 날짜수를 꼽아보니 무려 18일간씩이나 됩니다. 일주일은 마눌님에게 시간 할애해주고 또 일주일은 지리산 태극종주가고 그래도 리프래쉬란 것을 할 만한 시간의 여유가 있어 마음이 흐뭇합니다.
지난여름 휴가 때 덕산을 출발하여 딱바실계곡으로 하산한 지리산 태극종주 실패의 아픈 경험이 있습니다. 지리산 태극종주 재도전을 위해 5월 7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새벽에 눈을 떠보니 어버이날 효도하겠다고 울산에서 먼 길 마다하고 달려온 아드님, 따님이 콜콜 자고 있는 모습이 하도 예뻐 차마 집을 나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 저놈들 효도나 한번 받아보고 떠나자」라는 심산으로 출발을 하루 미루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효도는 집안 어느 구석에도 없었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내 눈 앞에 얼쩡거리는 것이 저놈들이 할 수 있는 효도 노릇의 전부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나는 만족합니다.
내가 생각해도 배낭꾸리기가 정말 야무딱지게 잘 되었구나고 생각되어 흐뭇한 마음으로 스물다섯의 건장한 아드님에게 저울질 해보라고 했더니만 이노무시키 쩔쩔 맵니다. 똑 떨어지는 23Kg입니다.
작년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에는 산행시작이 조금 완만한 인월의 덕두산을 시작으로 거꾸로 덕산까지 가기로 하고 노고단, 장터목, 밤머리재에서 각각 하룻밤을 비박으로 보내겠다고 계획도 세웠습니다. 구인월마을 회관을 기점으로 산행을 시작해야하니 인근의 월평마을 골목길에 삼철이를 주차를 시켰습니다. 언제 어느새 보셨는지 앞집 할매가 쪼르르 달려오시더니 꽁시랑꽁시랑 말씀이 너무 많으셔서 구인월마을 회관 앞 느티나무 밑에 이동 주차를 하였습니다.
구인월마을(9:15) 골목을 따라서 고집통의 새로운 역사적 지리산 태극종주가 다시 한 번 시작 되었습니다 . 마을을 벗어나고 산길을 조금 올라가니 5월의 햇살에 힘입어 온몸에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면서 휴식이 필요해지고 갑자기 마음이 슬퍼지기 시작합니다. 출발하고 몇 발자국을 띄지 않은가 같은데 짊어진 고생보따리가 너무 무거워 후회막급입니다. 배낭 속의 물건 중에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은 없고 그렇다고 나흘분의 음식을 다 먹어 치울 수도 없으며 힘들다고 되돌아갈 수는 더 더욱 없습니다. 남자가 칼을 뽑았는데 지금 하산하여 돌아간다면 동네 웃음거리가 될 것은 자명한 일이고 영 죽을 지경의 무게는 아니니 그래도 가는데 까지 가보고 그때 가서 결정하기로 단단히 마음먹었습니다.
덕두산 안부(10:27)에 도착했는데 겨우 0.7Km만 왔다는 이정표가 살살 질리기 시작하고 가다 쉬기를 여러 번 끝에 흥부골휴양림 갈림길까지 힘겹게 올랐습니다. 덕두산 정상(12:38)에서 호흡을 고르고 곰곰 생각하니 일단은 힘든 오르막길은 다 올라왔고 지금부터는 높낮이 완만한 능선길이니 갈수 있다는 희망의 불씨가 살살 생기기 시작합니다. 지금부터는 덕두산을 거쳐 흥부골로 하산하는 산님들도 한두 명씩 스쳐지나갑니다.
인산인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바래봉(13:23) 정상에 올라 있습니다. 바래봉 철쭉을 찾아온 전국의 산악회란 산악회가 오늘 다 올라온 것 같습니다. 정상을 기념하는 사진을 한 장 남기고 싶었지만 떼거리로 몰려온 아지매들이 도통 자리를 내놓지 않아 사진 찍기를 포기하고 바로 아래 풀밭에 퍼질러 앉아 빵 쪼가리로 점심식사를 때우기로 하였습니다. 바래봉 샘터(13:45)에서 식수를 보충하고 팔랑치로 향했지만 차가 다닐 수 있는 넓이의 신작로인데도 불구하고 마주 오는 산객들과 부딪쳐 진도가 도통 나가지 않습니다. 팔랑치(13:55) 주위에는 아직 철쭉이 꽃 봉우리도 맺기 전이건만 남녀노소의 울긋불긋 현란한 등산복이 화려한 물결로 꿈틀거립니다. 지난겨울이 유난이 추웠기에 철쭉 개화가 예년에 비해 많이 늦어진 것을 감안하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허탕을 친 것입니다.
부운치(14:05)를 지날 즈음에는 오늘의 목적지를 노고단에서 정령치로 수정해서 낮춰 잡았습니다. 세동치 삼거리(16:45)에 앉아 전북 청소년 야영장으로 철수를 하느냐 아니면 힘들지만 정령치까지 가보느냐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순간 눈앞에 구세주가 나타났습니다. 다들 세동치에서 하산하고 있는 마당에 두 분의 산님께서 박배낭을 짊어지고 올라오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세동치 근처에 샘터가 있다는데 혹시 아시느냐는 내 물음에 그곳에서 오늘밤을 지새울 요령으로 이곳에 오셨다며 무조건 따라오라 하십니다.
세동치 헬기장에서 왼쪽으로 약 10m를 내려가니 수량 풍부한 샘터가 있고 인근에 비박하기 안성맞춤인 자리가 여러 군데 있습니다. 지체 없이 텐트를 준비하고 저녁식사와 약간의 술자리가 준비됩니다. 연세 지긋하신 전주에서 오신 정남철선생님은 한마디로 지리산에 관한한 모르는 것이 없는 지리산 산신령 수준입니다. 전주산사랑 산악회원이시고 광속단의 초기 멤버이시며 요즘은 울트라 마라톤을 하고 계시는 대단한 분이십니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은 그런 분입니다. 젊은 한분은 정 선생님의 사위인데 서울에서 장인의 부름을 받고 일부러 내려와서는 이곳까지 올라왔다 합니다. 어쩜 장인과 사위 간에 친구처럼 이렇게 궁합이 잘 맞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아 그 모습이 너무 부러워서 내 딸내미도 시집갈 때 저런 사윗감이 그물에 걸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 보기 좋은 장인과 사위였습니다.
바람은 스산하게 불고 1,000m 고지에서 웬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오줌은 마려운데 뒤가 켕겨 텐트 밖을 감히 나갈 수가 없습니다. 오줌통은 터질 것만 같아도 참고 또 참아 어느 정도 날이 밝아올 무렵에야 텐트 밖을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아침에 정 선생님께 이런 높은 고지에 개가 있을 수 있느냐니까 아마도 승냥이일 것이라며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에 아무리 사나운 짐승이라도 절대로 사람 근처에 접근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저녁부터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는데 새벽부터 많은 구름이 반야봉과 달궁계곡을 품었다 사라지곤 합니다. 짊어지고 갔던 양식을 하루 밤새 거의 다 비웠기에 배낭무게가 가뿐해졌습니다. 샘터(7:55)를 출발하여 세걸산(8:30)까지는 세 명이 같이 올랐다가 두 분은 되돌아 서북능선을 걷겠다고 하시니 다음에 좋은 인연으로 만나기를 약속하고 고요한 아침 고집통 홀로 정령치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안개비를 머금은 구름이 용틀임하면서 하늘로 치솟았다가 사라지는 형국이 제법 비가 많이 올 전조 같습니다. 세걸산을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른 아침에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학생을 동행한 모자가 나타납니다. 저어기 놀라긴 했지만 서로가 오늘 산행 중 처음 만나는 손님들인지라 무척 반가워합니다. 엄마의 열성에 못 이겨 따라 왔겠지만 그 학생도 대단합니다.
백두대간 갈림길이 있는 큰고리봉(10:30)에 도착해서는 정령치가 눈앞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놓입니다. 아마도 태극종주 하시는 분들인 모양입니다. 거의 총알수준으로 5명의 산님이 지나갑니다. 내 다리가 저렇게 놀려주어야 할 건데 부럽습니다. 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정령치(10:50)에는 지리산 구경 나온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최소한 성삼재까지는 가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이제 빗방울도 굵어지고 몇 시간 더 산행한들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이번 지리산 태극종주를 여기서 접기로 하였습니다.
거창하게 출발했던 두 번째 지리산 태극종주를 이렇게 포기하고 터벅터벅 달궁계곡 방향으로 걸어 내려갑니다. 이제부터는 자동차 히치입니다. 설마 손들면 세워주겠지 믿고 내려가다 재수 좋게 단박에 성공합니다. 임실 치즈마을에서 사장님으로 계신다는 내 또래 나이의 부부께서 여행길에 흔쾌히 달궁마을까지 태워줍니다. 그렇게 해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곰곰 생각하면 참 억울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억울해도 내 잘못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지리산은 절대 도망가지 않으니 또 도전하면 됩니다. 삼세판 중 세판 째는 올여름 휴가로 다시 확정했습니다. 꼭 성공하고 말 것입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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