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백두대간·정맥/백두대간[완]

[백두대간 - 9] 내 아버지와 함께하다

산안코 2009. 9. 13. 16:23

◈ 언            제 : 2009. 9. 12 (당일)
◈ 어    디     를 : 백두대간 9구간(신의터재~갈령 삼거리)
◈ 누            가 : 삼성중공업 산악회원 43명과 고집통
◈ 날            씨 : 흐리고 맑았다가 소나기 후 맑음
◈ 대간 산행시간 : 116시간 46분(9구간: 9시간 00분)
                        14일차 신의터재(8:30)→갈령 삼거리(17:30) 9시간 00분
                        접근거리 갈령 삼거리(17:30)→갈령(17:50) 20분
◈ 대간 산행거리 : 264.54Km (9구간: 23.26Km)
                        14일차: 23.26Km, 접근거리: 1.3Km
◈ 총    산행거리 : 신의터재→무지개산 삼거리→윤지미산→화령재→산불감시초소
→봉황산→비재→갈령 삼거리→갈령(24.56Km)

내 아버지께서 다른 세상으로 떠나셨습니다. 살아 생전 손대 보지 못한 내 아버지의 얼굴. 그토록 평온한 얼굴을 주검 속에서 직접 내 손으로 만져도 보았습니다. 곡기를 잇지 못하시며 그렇게도 힘들어 하시더니 결국에는 이 길을 택하신 당신을 생각하니 내 마음이 울컥하고 안타까움이 가슴속으로 밀려옵니다.
새벽 3시 반. 현관문을 열고 나가니 벌써 조간신문이 들어오고 아직까지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제법 굵은 빗줄기가 내립니다. 아버지의 눈물로 받아 들여야겠습니다.
이젠 대간길도 제법 멀리 올라왔나 봅니다. 거제를 출발하여 무려 네 시간을 달려서야 경북 상주의 신의터재에 도착이 됩니다.
큰재, 개터재등 지나온 여러 재에서 보았던 금강과 낙동강의 물줄기가 나누어진다는 『분수령』이란 간판이 여기에도 서있습니다. 그리고 몇일 지나면 고랭지 포도축제가 열린다는 현수막도 여기저기 걸려있습니다.
그저께 아버지를 창원의 길상사에 모셔놓고 오늘은 첫 번째 지내는 49제인데 대간길 나서는 내 마음이 자꾸 쓰입니다. 내 아버지와 함께 한다고 백두대간을 걸으면서 좋은 생각을 갖기로 하자고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신의터재(8:30)를 출발합니다. 

  

◈ 신의터재 - 백두대간 아홉번째 산행 들머리

 

◈ 뒤돌아 본 신의터재

  

거제에서 내리던 비가 다행히 여기에는 내리지 않습니다. 하늘은 잔뜩 찌푸렸으나 나뭇잎 사이로 간간이 맑은 햇살도 보여줍니다. 언제 가을이 왔었는지 결코 습하지 않은 상쾌한 가을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갑니다. 산악회에서 단체로 주문한 오렌지색 유니폼도 산뜻함을 더해줍니다.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그다지 힘 들이지 않고 산 능선을 타고 오릅니다. 무지개산 삼거리(9:30)를 지나 평지 같은 오르막을 한참 그렇게 걷노라니 윤지미산(10:45) 정상에 도달합니다. 돌무더기 위에 세워놓은 못생긴 정상석에 못생긴 글씨로 써놓은 형상을 보고 누군가 우스개 소리로 김지미가 아닌 윤지미산이라고 하는데 왜 윤지미산인지 그 유래는 네이버도 다음도 잘 모릅니다.
왼쪽 언덕 아래 엄청난 규모의 인삼 밭(11:00)이 나오고 발 아래에서는 잘 뻗은 청원 상주 간 고속도로에서 많은 차량들이 굉음을 내며 쌩쌩 달립니다. 

  

◈ 윤지미산의 고집통 - 왠 윤지미?

 

◈ 인삼 재배지

 

◈ 청원-상주 간 고속도로을 뒤로 두고 선 고집통

  

상상을 초월한 스피드를 내어 화령재(11:30)에 내려서니 잘 만들어진 화령재 정자가 있고 문장대로 갈 수 있다는 도로 표지판이 보입니다. 머지않아 속리산이 있는가 봅니다.
인근에 『효자 정재수 기념관』이 있다는 표지판이 눈에 띄어 내 가슴을 뜨끔하게 합니다. 여태까지 없던『효(孝)』 관련 지명이 왜 하필 오늘 내 눈에 보이는지 차~~암. 그래서 한번 알아보았습니다.
『상주시 사산초등학교 2학년 재학 중 1974년 1월 22일 아버지와 함께 12㎞ 떨어진 충북 옥천 큰집에 차례를 지내러 가던 중 폭설 속에 쓰러진 아버지를 구하려고 애쓰다가 자신의 옷을 아버지에게 덮어주고 함께 하늘나라로 떠난 효자 정재수의 효행을 널리 알리고 효 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효자 정재수 기념관」을 건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충무김밥에 소주를 반주 삼아 점심식사를 하고 25번 국도를 따라 약간 위쪽으로 이동하여 봉황산 자락(12:45)으로 치고 오릅니다. 

  

◈ 화령재에 선 고집통

 

◈ 화령재 모습

 

◈ 화령재의 고집통 - 효자 정재수가 넘었던 고개

 

◈ 화령재에서 봉황산으로 출발하는 일행들

  

내가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한지 오늘 처음으로 전리품이 생겼습니다. 솔방울 보다 훨씬  크고 잘생긴 잣나무 방울입니다. 송진이 끈적끈적하여 다루기가 쉽진 않지만 우리 마눌님 좋아할 것 같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잣 방울이 들어갔던 배낭 옆 주머니 그 자리에 있었던 500ml짜리 날진 물통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봉황산과 나의 물물교환이 원만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한참 가파른 산을 치고 오르니 산불 감시초소가 나오고 한번 더 가파른 산길을 치고 오르는데 맑았다 흐렸다 하던 날씨가 갑자기 한줄기 빗줄기를 몰고 와서는 잠깐의 틈도 주지 않고 머리 위에 내리 쏟아 붓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땀 흘리는 내 모습이 안쓰러워서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청량수를 내리시는 모양입니다.
봉황산 정상(14:15)에 오르면 좀 쉬어야지 생각했는데 갑자기 쏟아지는 비로 인해 계속 앞으로 진행하고 보니 언제 비가 왔느냐는 식으로 하늘이 쾌청하게 개였습니다.

  

◈ 대간중 첫 전리품(잣송이) - 날진 물통과 물물교환

 

◈ 봉황산 정상 모습

 

◈ 봉황산 정상의 고집통 - 소나기 쫄딱 맞음

  

또 이해 가지 않는 일이 생겨있습니다. 길옆에 내 팔뚝만한 무시무시한 포탄 한 개가 떡 하니 버티고 있습니다. 왜 여기에 저것이 왔는지? 저것이 언제 치워질는지? 나중에 저것이 폭발 할는지? 저걸 신고하면 틀림없이 나를 오라 가라 할 텐데 그냥 못 본체 하는 것이 아무래도 나을성 싶습니다.
낙엽송이 쭉쭉 빵빵 잘도 뻗으니 소나무도 참나무도 덩달아 쭉쭉 빵빵 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재(15:35)가 나오지만 바로 철계단을 타고 오르고 아주 큰바위 옆을 스쳐지나 잠시 휴식을 취하고 지도를 보니 삼형제 바위란 글자가 눈에 들어 옵니다. 아~하 여기가 삼형제 바위구나 생각했는데 큰 착각이었습니다. 

  

◈ 비재에서 갈령삼거리 가다 만난 무시무시한 포탄

 

◈ 비재 전경

  

나는 여기서 20분만 가면 갈령삼거리가 나온다는 믿음으로 정말 열심히 걸었건만 아무리 가도가도 나오지를 않고 살살 왼쪽다리에는 경련이 생길 증세가 보입니다. 나오라는 갈령삼거리는 나오지는 않고 인터넷에서 자주 접했고 꼭 한번 오고 싶었던 충북 알프스 갈림길이 나옵니다. 바로 앞에 네 사람의 산님을 만나 갈령삼거리가 어디냐고 물어보니 벌써 지나왔다고 합니다. 답답한 심정에 그럼 아저씨들은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어보니 자기들도 갈령삼거리 간다고 하면서 자기들은 계속 앞으로 가고 있습니다. 인간들이라서 저렇지 아마도 짐승이면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정말 인간성 나쁜 사람 들입니다.
암봉을 두어개 스쳐 지나고 오르내림을 몇 번 한 후에 드디어 갈령삼거리(17:30)입니다. 간단하게 20분이면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한 시간 반이나 걸려 도착한 것입니다.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갈령으로 바로 하산입니다. 가파른 하산 길에 순한 얼굴의 돌고래 얼굴상을 닮은 큰 바위가 있습니다. 그리고 갈령(17:50)이 나옵니다. 

  

◈ 가야 할 대간길

 

◈ 갈령 삼거리 이정표 - 백두대간 아홉번째 산행 날머리

 

◈ 갈령 가다 만난 순한 돌고래 얼굴바위

 

◈ 갈령에 내려선 고집통

  

다음 열 번째 대간길의 하산도 이곳으로 한다고 합니다. 무시무시한 국공파들이 잠을 잘 때 살짝 눈을 피해 늘재에서 문장대 구간을 거꾸로 쳐서 내려 온답니다.
이번 산행은 내 아버지와 함께 걸었기에 편안한 길을 열어주셨다고 생각이 들며 내 아버지에게 살아 생전 효를 다하지 못해 내내 아쉬움이 남았으며 이제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가신 당신을 생각하면 정말 애달프기 그지없습니다. 다음 세상은 고통 없고 아프지 않는 그런 세상으로 극락왕생 하셨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