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백두대간·정맥/백두대간[완]

[백두대간 - 13] 겨울 그림은 하얀색이다

산안코 2010. 1. 17. 02:08

□ 언             제 : 2010. 1. 16  (무박 2일)
□ 어     디     를 : 백두대간 15구간(저수령~죽령)
□ 누            가 : 삼성중공업 산악회원 43명과 고집통
□ 날            씨 : 새벽 칼바람 -15도 맑음
□ 대간 산행시간 : 171시간 43분(15구간: 13시간 10분)
                        19일차 저수령(4:25)→죽령(17:35) 13시간 10분
□ 대간 산행거리 : 352.07Km (15구간: 20.18Km) 19일차: 20.18Km
□ 산 행     코 스 : 저수령→촛대봉→배재→싸리재→흙목→솔봉→모시골→묘적령
→묘적봉→도솔봉→흰봉산갈림길→샘터→죽령(20.18Km)

 

그림 그리는 방법만 달랐을 뿐입니다. 내가 그린 것은 하얀색 바탕에 검은 크레파스로 그렸을 뿐이고 오늘 내가 보고 온 하느님의 것은 검은색 바탕에 하얀색 물감만 썼을 뿐인데 작품 수준차이가 큽니다.
예보와는 달리 서울에는 100년만의 눈 폭탄이 쏟아졌다고 말 잘못한 기상청 때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겨울철 소한, 대한 지나면서 이정도 추위야 당연지사이거늘 말하기 좋아하는 몇몇 칼럼 리스트들은 급기야 지구상에 빙하기가 도래했다며 각종 매스컴에 도배칠을 해놓았습니다. 내일은 신년 들어 처음으로 대간 길나서는 날인데 기상청은 오늘 서해안과 호남지방에 폭설이 있을 거라고 예보를 합니다.
지난날 내린 눈이 쌓여 이화령에는 버스 진입이 불가능하고 예정된 하늘재 구간은 암벽이 많고 위험지역이 상시 도사리고 있어 겨울산행으로는 무리가 예상되어 두 구간을 건너뛰어 열다섯 번째 예정구간인 저수령에서 죽령까지를 먼저 가기로 결정되었다고 산악회 운영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올겨울 언제부터 영업을 접었는지 모르겠지만 저수령주유소 입구는 철조망이 쳐져 있고 영업의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옛날 이 고개를 넘든 길손들이 너무 힘들어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고 저수령이라 칭하였다니 해발 850m에 위치한 이곳에 서보니 고개가 끄떡여집니다.
저수령 앞마당에는 제법 많은 눈이 쌓여있습니다. 스패츠와 아이젠을 단단히 착용하고 눈만 배꼼이 내 놓은 채 완벽하게 얼굴을 감싸고 스트래칭으로 굳은 몸을 풀어봅니다. 아무도 지나지 않은 눈밭으로 촛대봉을 찾아 선두가 출발(4:25)하고 나도 바로 그 뒤를 따릅니다.

  

□ 저수령 주유소 앞 공터 - 백두대간 열세번째 15구간 산행 들머리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앞선 자의 발자국만을 밟고 따라서 가파른 산길을 오릅니다. 잘 다져진 눈길이 아니고 포슬포슬한 눈가루로 덮인 길이기에 아무리 아이젠을 착용했다고는 하나 한발자국을 앞으로 전진하면 반발자국 정도는 뒤로 미끄러져 내려오기에 영 진도가 나지 않습니다. 열손가락 끝은 얼마나 시린지 이러다 동상 걸려 손가락 잘라내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시립니다. 계속해서 스틱을 꼭꼭 잡았다 놓았다 하기를 한참 지나서야 손에서 땀이 났는지 견딜만해 졌습니다.
1,080m 촛대봉(5:05)의 정상석이 세로로 뚝 부러져 있습니다. 정말로 희한한 일입니다. 선답자들의 산행기에는 분명 멀쩡한 정상석이었는데 누가 왜 그랬을까 의문입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 바로 넘어 촛대같이 생긴 바위 하나도 서 있었습니다. 

  

□ 깨진 촛대봉 정상

 

□ 소백산 투구봉 정상

 

□ 투구봉에서 고집통

  

투구봉(5:20)까지는 그래도 그런대로 잘 달렸습니다. 내 느낌에 줄곧 왼쪽으로 왼쪽으로만 돌아갑니다. 내리막길이 연속으로 나타나면서부터는 제대로 걷지를 못하고 미끄러지고 엉덩방아 찧고 넘어지고 엎어지고 구르고 그렇지만 싫지는 않습니다. 푹신푹신한 눈 카팻에 굴러보는 맛이 그런대로 즐겁습니다. 뒤따르던 만호님이 자꾸 미끄러져 넘어지는 내게 혼자서 길바닥의 것을 다 주워간다는 개그를 하십니다.
나중에 왜 그렇게 눈이 미끄러웠나 생각해보니 눈이 내린 이래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눈길을 선두가 러셀을 하면서 지나기에 다져지지 않은 눈들이 심술을 부린 것이었습니다. 배재(7:00)에서는 선채로 잠시 휴식의 달콤함을 맛보고 다시 걸음을 옮기고 아마도 유두재(7:28)였었나 봅니다. 동녘하늘에서는 붉은 여명이 산 능선을 따라 펼쳐져 오고 있습니다.
대간길 가는 오늘도 멋진 일출을 감상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싸리재에 빨리 내려갔다가 얼른 맞은 편 산등선 쯤에 올라서면 일출이 진행되리라 예상했건만 싸리재(7:40)에서 아침식사를 한다기에 생각을 접었습니다. 갈비탕에 햇반 말아 소주 한잔을 입 속에 틀어 넣으니 아침 민생고가 해결되고 생기가 살아납니다. 새벽 내내 흘러내리는 콧물 처리에 수도 없이 문질렀던 코끝이 소주가 들어가니 자동으로 루돌프가 됩니다. 아침술 재미 붙여 대간 끝날 때쯤이면 초뺑이 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요놈의 술이 있어 심신을 행복하게 해주니 인류의 위대한 최대 유산이라 생각합니다. 

  

□ 배재로 내려 가면서 맞이한 새벽 여명

 

□ 눈밭에서 아침식사 준비하는 일행들

 

□ 영하 15도의 아침식사

  

다시 재무장하고 출발을 서두르며 장갑을 끼니 땀으로 젖었던 장갑 속이 뻐덩뻐덩 얼어있습니다. 얼마간은 또 한번 손가락 얼어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얼마간 이동하니 등로 옆에서 쪼그려 앉아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여섯 명의 대간꾼을 만났습니다. 안양에서 왔으며 출발지가 우리와 같은 저수령이었는데 운 좋게 우리가 러셀한 구간을 뒤따라 오다가 싸리재에서 우리를 스쳐 지났고 다시 뒤를 따르다 결국에는 묘적령에서 추월해 가버렸습니다.
흙목(9:30) 정상이라는 이정표가 있어 왜 이런 이름이 생겼는지 궁금하여 컴퓨터 검색포털 사이트에 아무리 조회해봐도 그 연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냥 그런 것이 있으면 고개 끄떡이고 지나가면 되는데 나도 참 궁금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날은 밝아 어느 듯 해는 중천에 올랐으며 파란 하늘 아래 하얀 눈 천지인 대간길의 산마루금이 눈 앞에 펼쳐 일대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나무 가지에 핀 눈꽃이 새로운 기쁨을 선사해 줍니다. 겨울 산행의 맛이 바로 이런 그림이 있어 유혹에 못 이겨 많은 산님들이 보따리 둘러메고 집을 나서는 것일 것입니다.
선두의 러셀은 끝없이 이어지고 눈길 엉덩방아 찧기는 그냥 다반사이며 심지어는 본인 의사와는 달리 눈길 자동차 미끄러지는 것처럼 등로 밖으로 미끄러져 내려가 위험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어느 지점에선가 거대한 철탑이 대간길 옆에서   철이 없는 일행들을 쳐다보고 혀를 끌끌 차고 있습니다. 헬기장(10:22)이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헬기장을 만들었으니 헬기장이라는 지명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참 성의가 없습니다. 

 

□ 흙목 정상의 설화

 

□ 흙목에서 바라 본 눈 덮인 대간

 

□ 흙목의 시그널들

 

□ 흙목의 경치

  

솔봉(11:05)을 지나고 모시골(11:30) 정상에 도착해서 이제 도솔봉만 넘게 되면 오늘 산행 마무리되는 줄 알고 처음으로 지도를 끄집어내어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운영진에서 출발 전 산행시간이 8시간 안팎을 예상했기에 새벽부터 7시간 남짓을 걸었으니 시간상 충분이 그럴 것이라 믿었는데 이것이 무슨 조화인지 거리상 아직 절반도 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눈길 러셀로 인하여 발걸음이 평상시 보다 1.5배의 속도가 더뎌지고 만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묘적령(12:30)부터는 영주 고향치와 단양 사동리에서 올라온 선답자들의 흔적에 힘입어 러셀이 필요 없어 발걸음이 빨라질 수 있었고 미끄러져 넘어지는 예가 없어졌습니다.
이름대로라면 뭔가 묘한 것들이 쌓여져 있어야 하는 묘적봉(13:00)에 올라섰건만 그다지 묘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정상 한 켠에 돌탑 하나 어설프게 쌓여 있는데 그래서 묘적봉은 아닐 거라 생각됩니다. 

  

□ 솔봉에서 고집통

 

□ 묘적령

 

□ 묘적봉 정상

  

거대한 산봉우리 도솔봉이 어느새 눈앞에 서있고 엄청 많은 나무계단도 보입니다. 점심식사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기에 배꼽시계는 자꾸 알람을 울리고 다리의 힘은 풀려가지만 1,000m 고지의 산 능선 칼 바람 때문에 쉽사리 만찬장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도솔봉 언저리에서 간단한 끼니를 해결하고 나무 계단을 힘겹게 올라 헬기장에 도착하니 도솔봉(14:58)이라는 정상석이 나옵니다. 하얀 눈을 뒤집어 쓴 아름다운 월악산 산줄기가 조망되고 건너편에는 내가 언젠가는 이어가야 할 백두대간 소백산구간이 펼쳐져 있으며 오늘 목적지 죽령휴게소가 보입니다.
바로 몇 발자국 너머 잘 생긴 정상석과 돌탑을 가진 진짜 도솔봉(15:05)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헬기장의 도솔봉은 가짜였었습니다. 일대 최고봉답게 세상이 발 아래입니다. 흰 물감 한가지 색으로 사방팔방 하느님이 그린 작품이 끊임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남김없이 가슴에 모두 주워 담았습니다. 

  

□ 걸어 온 대간을 뒤로하고 도솔봉 정상에서 고집통

 

□ 도솔봉 정상에서의 고집통

 

□ 눈 위에 찍힌 산짐승의 발자국 - 뭘 먹고 살런지

 

□ 도솔봉에서 바라 본 소백산 천문대

  

삼형제봉도 계단의 연속으로 힘든 고행은 이어집니다. 정확히 어딘지 몰랐지만 삼형제봉도 통과했었나 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흰봉산 삼거리(16:20)에 도착되고 후미를 따르고 있는 일행들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며 배낭을 비우고 나서 발목까지 빠지는 눈 쌓인 완만한 경사길 5Km를 무상무념, 무 브레이크로 그냥 무조건 내달렸습니다. 이런 길이라면 옛날 어릴 적 즐겨 타던 비료포대 하나 있었으면 편할 것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물맛 죽여주는 샘터(17:10)가 눈 속에 숨어 있습니다. 오죽하면『이 물맛보지 않고 가면 평생 후회 할 것이다』고 뒤 따라오는 일행에게 내가 말했을까요? 정말 가슴속까지 후련합니다.
그리고 또 마구 내달렸습니다. 죽령옛길 표지판이 나오고 또 다른 국립공원 소백산의 시작점 죽령고개(17:35)에 도달하니 이미 날은 어둑어둑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곳 죽령은 옛날 어느 도승이 짚고 다니던 대나무 지팡이를 꽂아 놓고 갔는데 그것이 살아났다 하여 죽령이라 칭하였다 하고 최근 뚫린 중앙고속도로가 발 밑을 지나고 있습니다. 

  

□ 눈 속에 파묻힌 샘터

 

□ 영남관문 죽령 - 남한고개

 

□ 죽령고개 - 백두대간 열세번째 15구간 산행 날머리

  

산행시간 8시간 예상대비 약 14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산행을 마쳐보니 겨울 눈 산행의 위험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고 집 나설 때는 항상 교만하지 않는 마음으로 사전 충분한 지식과 꼼꼼한 장비, 행동식을 챙겨야 하며 무리한 도전은 삼가야 됨을 큰 교훈으로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게 감사하고 겸손해야 됨도 함께 말입니다.